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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남산권 >

 

화랑교육원

화랑도는 화랑을 대표로 한 신라시대의 청소년 수련단체를 의미하는데 화랑(花郞)이라는 말은 ‘꽃처럼 아름다운 남성’이라는 뜻이며 화판(花判), 선랑(仙郞), 국선(國仙), 풍월주(風月主)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화랑도는 단체 정신이 매우 강한 청소년 집단으로 교육적, 군사적, 사교 단체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능한 인재를 많이 배출함으로써 신라의 삼국 통일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한편으로는 골품제 사회에서 발생하기 쉬운 여러 계층간의 긴장과 갈등을 조절하고 완화하는 데도 이바지하였다.

 

통일전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역사적 성업을 완수한 태종무열왕, 문무왕, 김유신장군의 업적을 길이 찬양하고 화랑의 호국정신을 오늘에 이어받아 발전하는 조국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자 이 곳에 통일전을 조성하였다. 통일전에는 태조무열왕, 문무왕, 김유신장군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회랑에는 삼국통일의 기록화가 전시되었다. 경역에는 삼국통일기념비와 태종무열왕, 문무왕, 김유신장군의 사적비가 서 있다. 통일전은 모두 콘크리트식 건물위에 기와를 이어놓은 전형적인 그 시절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인공연못 및 주차장 시설 등의 부대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호국영령의 뜻을 기리자는 뜻인 만큼 초,중등학생들의 이념교육장 형태로 이용되고 있으며 수학여행의 필수코스인듯 하다

 

서출지

신라 21대 소지왕(488) 정월 보름날, 명활산성에서 옛 궁성이던 월성으로 대궐을 옮겨 놓고 신하들을 위로하기 위해 천천정에 행차하였다. 임금과 신하들이 거나하게 취하여 있을 때, 한 마리의 쥐가 상 밑으로 기어들고 한 마리의 까마귀가 나뭇가지에서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임금은 음식이 있는 곳에는 으레히 오는 짐승들이라 고기를 집어 쥐에게 던져 주었다. 고기를 받아먹고 쥐가 사람처럼 말했다. “임금님, 저 까마귀 가는 곳으로 사람을 보내시오.”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임금은 그제서야 쥐가 나타난 일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고 날쌘 장수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 가게 하였다. 까마귀는 동남 산으로 날아갔고, 장수는 까마귀의 뒤를 따라갔다. 까마귀는 장수를 기다리는 듯이 일천바위 위에 잠깐 앉았다가 피리마을 양기못 쪽으로 날아갔다. 장수도 부지런히 뒤를 쫓아 양기못으로 갔다. 양기못 가에서는 큰산돼지 두 마리가 무섭게 사우고 있었다. 송곳같은 어금니로 상대방을 떠받으며 밀리고 밀며 서로 힘을 겨루다가 그만 한 마리가 풍덩하고 물에 빠지니 떠밀고 가던 돼지도 뒤따라 풍덩하고 물에 빠지고 말았다. 돼지 싸움을 정신없이 구경하던 장수가 풍덩소리에 정신이 번쩍들었다. 그동안 까마귀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경주 나정

혁거세의 탄생지로 알려지고 있는 나정은 혁거세의 능으로 전해오는 오릉(五陵)과 인접하여 있다. 사실여부의 문제는 접어두고 이들의 실체를 모두 인정할 경우 탄생과 죽음이 모두 동일한 공간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릉사거리에서 경주시 내남면으로 진입하는 35번 국도를 따라 남으로 내려가다 300~400m 정도 가다보면 좌측으로 하여 남간마을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이 길은 양산재,신라 제7대 일성니사금의 능, 남간사지, 천은사지, 창림사지등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입구에서 동으로 보면 낮은 구릉지대에 송림이 울창한 공이 보인다. 그곳이 사로국의 개창자인 혁거세가 탄생한 곳으로 전하는 나정이라는 우물이 있는 곳이다.

 

포석정

『삼국유사』에 의하면 포석정은 임금의 놀이터로 쓰이던 이궁(離宮)이었던 것 같다고 한다. 지금 이궁은 없어지고 전복모양의 석구가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석구가 유상곡수(流觴曲水,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잔이 자기 손에 닿으면 詩를 짓는 놀이)의 잔치를 베풀었다는 곳이다. 이곳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으로 『삼국유사』에 헌강왕과 연관된 이야기 속에서 보인다. 혼강왕이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함께 향연을 베풀고 있을 때 남산신이 왕 앞에서 춤을 추었으며 왕은 신이 돌아간 후 신하들 앞에서 그 춤을 흉내내어 보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춤을 어무상심무(御舞詳諶舞)라 하였다고 한다. 창건연대는 미상이고 석구의 폭이 평균 약 31㎝, 깊이가 약 22㎝, 총 길이는 22m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