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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포동해안권 >

 

감은사지 삼층석탑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이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의 뜻을 받들어 즉위한 이듬해(682)에 완공하고 감은사(感恩寺)라고 불렀다. 1959년 발굴조사에 의하면 중문(中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기단석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초석이 놓인 자리만 확인되고, 금당(金堂)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기단은 이중기단이다. 북쪽에는 기단석과 계단석이 남아 있다. 금당의 바닥은 방형대석을 이중으로 놓아 위쪽 대석위에 장대석을 걸쳐놓았고 그 위에 큰 장대석을 직각으로 마치 마루를 깔 듯이 깔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았다. 이 마루 장대석 밑은 공간이 된 특수한 구조로 다른 예가 없는 것으로 보아 동해의 용(龍)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한 것 같다.

 

문무대왕릉

북면 봉길리 해변에서 약 200m 떨어진 바다중에 문무왕의 유골을 화장한 뒤 뼈를 뿌린 곳으로 알려진 대왕암이 있다. 문무왕은 '죽어 동해바다의 용이 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겠다.'며 죽은 후 화장을 해서 뼈를 동해에 뿌리고 장례절차는 검소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들인 신문왕은 그 유언을 따라 동해 중에 있는 바위에 유골을 뿌렸다고 하는데 신라에서 불교식 화장을 한 최초의 기록이다. 멀리서 보는 대왕암은 평범한 바위섬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바위 한가운데가 못처럼 패어 있고 둘레에 자연암석이 기둥 모양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워진 모습이다. 한 변의 길이 약 3.5m 되는 못 안에는 거북이 등 모양의 길이 3m, 폭 2.2m의 돌이 얹혀져 있다.

 

골굴암

석굴사원은 인도나 중국에서 흔히 보이는 형식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형태이다. 가장 큰 이유는 자연환경 때문이다. 석굴을 조성할 정도의 대규모 암벽이 없고 또 단단한 석질의 화강암이 대부분이라 석굴이 생기기가 쉽지 않다. 불국사의 석굴암만 해도 자연석굴이 아니라 인공으로 만든 석굴이다. 경주시 양북면 안동리 함월산 기슭의 골굴암에는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석회암에 12개의 석굴이 나 있으며, 암벽 제일 높은 곳에 돋을새김으로 새긴 마애불상이 있다. 조선시대 화가 정선이 그린 '골굴석굴'이라는 그림을 보면 목조 전실이 묘사되어 있다.

 

이견대

대왕암을 의미 있게 눈여겨 볼 수 있는 곳이 두 군데 있다. 대본초등학교 앞쪽에 있는 이견대와 동해구(東海口)라는 표지석 아래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기념비가 서 있는 자리이다. 이견대는 화려한 능묘를 마다하고 동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보였다는 곳이며, 그의 아들 신문왕이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보배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유서 깊은 곳이다. 이견대라는 이름은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라는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현재의 건물은 1970년 발굴조사 때 드러난 초석에 근거하여 최근에 지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