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암
멀리서 보는 대왕암은 평범한 바위섬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바위 한가운데가 못처럼 패어 있고 둘레에 자연암석이 기둥 모양으로 일정핝 간격을 두고 세워진 모습이다. 한 변의 길이가 약 3.5m 되는 못안에는 거북이 등 모양의 길이 3m, 폭2.2m의 돌이 얹혀져 있다. 못안의 물은 돌을 약간 덮을 정도이며거센 파도에 아랑곳없이 항상 맑고 잔잔히 흐르도록되어 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트인 십자형의 수로를 통하여 동쪽으로 들어온 물이 서쪽으로 난 수로의 턱을 천천히 넘어 다시 바다로 흘러나간다. 못안의 돌밑에 문무왕의 유골 장치가 있다는 설도 있지만 이는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증명된 사실이 아니다. 다만 외곽을 둘러싼 바위 안쪽에 인위적으로 바위를 따낸 흔적이 있는 것으로 그렇게 추정할 따름이다

사실 대왕암은 오래전부터 문무왕의 시신을 화장한 납골을 뿌린 신골처로 알려져왔으며, 주변 어부들은 이미 이곳을 신성하게 여겨 근처에도 잘 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대왕암의 수중릉으로 둔갑해 처음 발견된 것처럼 신문에 대서특필된 것이다. 문무왕은 아버지대의 백제 정벌(660년)에 이어 고구려 정벌(668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이후 신라에 대한 당의 야심을 알아채고 그 세력을 몰아내는 전쟁까지 치러냈다. 삼국을 하나로 통일하는 대업을 마무리하여 명실공히 통일신라의 찬란한 문화시대를 연 문무왕은 평소 이렇게 유언하였다. " 이때까지 우리 강토는 삼국으로 나누어져 싸움이 그칠날이 없었다. 이제 삼국이 하나로 통합돼 한 나라가 되었으니 민생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평화롭게 살게 되었다. 그러나 동해로 침입하여 재물을 노략질하는 왜구가 걱정이다. 내가 죽은 뒤에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지킬터이니 나의 유해를 동해에 장사 지내라. 화려한 능묘는 공연한 재물의 낭비이며 인력을 수로롭게 할 뿐 죽은 혼은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숨을 거둔 열흘 뒤에는 불로 태워 장사할 것이요, 초상 치르는 절차는 힘써 검소와 절약을 좇아라('삼국사기' 문무왕 21년(681)조)." 또한 '삼국유사'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신문왕은 681년 7월 7일 즉위하였다.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를 세웠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 이 절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 바다의 용이 되었는데.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682년에 마쳤다. 금당 계단 아래를 파헤쳐 동쪽에 구멍을 내었으니 용이 들어와 서리게 한 것이었다. 생각건대 유조로 장골(葬骨)케 한 곳을 대왕암이라 하고 절은 감은사라 하였으며, 그 후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라 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경주 부윤을 지낸 홍양호의 문집'이계집(耳溪集)'에는 그가 문무왕릉비의 파편을 습득하게 된 경위와 문무왕의 화장 사실, 그리고 대왕암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1796년 홍양호가 발견했다는 문무왕릉비 두 편 가운데 한 편과 그보다 작은 파편 하나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그 내용 중에 "나무를 쌓아 장사 지내다, 뼈를 부숴 바다에 뿌리다" 라는 대목이 있다. 결국 대왕암이 세계 유일의 수중릉이라는 것은 후세 사람의 욕심에서 나온 근거 없는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렇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문무왕의 호국 의지를 담은 대왕암의 본뜻이다. 대왕암은 사적 제158호 로 지정되어 있다. 문무왕의 화장과 관련된 유적지로는 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지고 있는 능지탑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발견된 ' 사천왕사지문무왕비편'이라는 묵서(墨書)를 근거로 문무왕릉비가 사천왕사에 세워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