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릉원
경주 시내를 멀리서 바라볼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집들 사이로 우뚝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고분들이다. 지금부터 천년도 더 넘는 시절에 살았던 옛 사람들과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터전이 한데 어울려 있기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비감이 더 진하게 느껴진다.
특히 경주의 고분들이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당시의 다른 지역들에 견주어서도 특이한 점이라 하겠다. 남산의 북쪽에서부터 국립경주박물관 자리와 반월성을 거쳐 황오동, 노동동, 노서동으로 이어지는 평지에는 고분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다.
그 가운데 약 12만 5,400평의 평지에 23기의 능이 솟아 있는 황남동의 대릉원은 고분군의 규모로는 경주에서 가장 큰 것이다. 경주시내 한 가운데에 있어 찾기도 무척 쉽다. 큰 나무없이 잔디떼가 잘 입혀져 있어 동산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1970년대에 엄청난 예산을 들여 공원화하기 전에는 멀리서도 황남대총의 우람하고 아름다운 능선 한눈에 들어왔으나. 담장을 둘러치고 무덤 앞까지 주차시설을 만들고 무덤 안 길 닦는 바람에 옛 정취는 사라지고 말았다.

대릉원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내부가 공개되어 있는 천마총과 이곳에 대릉원이라는 이름을 짓게 한 사연이 있는 미추왕릉, 그리고 규모가 경주에 있는 고분 중에서 가장 큰 황남대총 등이다. 남아 있는 23기의 능말고도 무덤 자리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봉분이 있는 무덤들만 남겨두고 모두 지워 버렸다고 한다.
대릉원의 각종 고분들에서 출토된 대표적 유물들은 다음과 같다. 모두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서수형 토기 거북이 몸에 용이 합쳐진 듯한 형상의 서수형( 瑞獸形 ) 토기는 지금의 대릉원을 정비할 때 담장자리에서 발굴되었다. 주전자처럼 물을 따를 수 있으나, 실용이 목적은 아니고 명기( 明器 )로 쓰였을 터이다.
수레형 토기 대릉원 동쪽 길인 계림로를 발굴할 때 나왔다. 수레 모양을 그대로 본 떠 만든 토기로 큼직한 바퀴가 양쪽에 달리고 그 위에 수레를 얹었는데 손잡이는 부러지고 없으나 두 바퀴를 연결한 축을 끼워 넣으면 지금이라도 굴러 갈 수 있을 정도로 사실적으로 만들어놓았다.
토우 붙은 항아리 목이 긴 항아리 어깨 부위에 새, 오리, 거북이 등과 함께 개구리를 물고 있는 뱀, 가야금을 타고 있는 임신한 여자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뱀, 남녀의 성행위 장면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풍요한 생산력을 빌고 벽사의 뜻으로 동물을 만들어 붙인 것으로 여겨진다.
상감목걸이 서수형 토기가 나온 고분 바로 옆의 한 고분에서 마노, 수정, 벽옥, 유리구슬, 곡옥, 상감된 유리옥 등으로 된 목걸이가 나왔다. 이 중에서 상감 유리옥은 코발트색을 바탕으로 하여 백·황·적·녹색으로 두 사람의 얼굴과 새 등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인물은 다분히 서역석이 얼굴을 하고 있어서 이 유리옥이 정확하게 어디서 만들어졌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서역 방면에서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의 고분양식
초기의 왕릉은 거의 다 현재의 경주시 안팎에 있고, 통일 전후의 왕릉은 대개 산기슭이나 말리 왕도에서 떨어진 곳에 있다. 풍수지리설의 발달한 통일 시기 전후에 이르러 왕궁에서 멀리 떨어진 산기슭이나 평지에 분묘를 썼던 듯하다.
고분에는 반원형, 원형, 와우형, 쌍봉형 등 여러 가지 형태의 것이 있다. 이런 형태의 고분도 초기의 것과 후기의 것으로 구분된다. 고분 형태에서 반원형 고분 원형 고분은 봉토 밑 부분이 원형 또는 반원형을 이루고 있는 것을 말한다. 와우형은 소가 꿇어앉아 있는 것 같은 형상이며(표주박같이 생겼다 하여 표주박형이라고도 함), 쌍봉형은 낙타의 등처럼 두 개의 봉우리가 연속되어 한 가운데가 푹 꺼진 낮은 지대로 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신라 고분의 외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과연 고분의 내부 구조는 어떨까? 이제까지의 발굴조사를 토대로 구분하면 대략 두 가지이다. 하나는 돌무지 무덤(적석총)이고 하나는 돌무지 덧널 무덤(적석목곽분)이다.
돌무지 무덤은 돌로 묘실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쌓은 것이다. 어른의 머리 크기만한 돌을 쌓아서 봉토를 형성한 것도 있다. 이런 분묘는 대개 문을 남쪽으로 내었다.
돌무지 덧널 무덤은 땅속에 곽이 들어갈 수 있게 장방형으로 판 뒤 모래와 자갈을 깔고 목제 곽을 넣고는 그 곽 안에 다시 목곽을 넣는 방식이다. 목관에는 썩지 않게 옻칠을 하고 죽은 이의 영혼을 영접한다는 뜻에서 주검을 화려하게 분장하여 안치하였다, 곽과 관 사이에는 많은 부장품을 넣어주며, 특히 피장자의 머리 쪽에 귀금속류의 귀중품을 넣었다.당시 이러한 능묘는 왕족이나 귀족의 신분과 그 영향력을 알리는 가장 성대한 역사였을 터이다. 따라서 이런 고분들은 그 시대 문화의 정수가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는 타임캡슐인 셈이다.
목곽 주위에는 더 큰 돌을 일정한 높이로 쌓고는 물이 새어 들지 못하게 진흙을 덮어 다진 뒤 다시 토사를 그 위에 덮어 봉토를 하였다. 이와 같은 고분은 규모가 크고 도굴당할 염려가 없다.

천마총
고분의 구조를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천마총(155호 고분)은 내부에 직접 출토유물을 전시하고 있어 대릉원의 고분 가운데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봉분의 높이 12.7m, 봉분의 밑지름이 47m이다.
천마총의 발굴은 1973년 4월 6일부터 12월 4일까지 진행되었다. 당시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전 연습 삼아 발굴해보자 해서 삽질이 시작되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 내부는 세상이 떠들썩해질 만큼 놀라웠다. 찬란한 신라문화의 보물창고가 천년만에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우선 천마총은 고분의 축조방법을 알게 하는 충실한 견본이 될 만하다. 먼저 땅을 고르고 목곽이 놓일 자리를 깊이 40cm 정도로 판 뒤 어른 머리 크기의 냇돌을 깔았으며, 분구 밑바닥 전체에 점토를 다져 두께 15cm 정도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폭 50cm, 높이 약 40cm로 냇돌을 깔아 일종의 받침대를 만들고, 그 위에 동서 6.6m, 남북 4.2m, 높이 2m, 크기의 목곽을 놓았다.목곽은 결국 지상에 놓이게 되는 셈이다. 목곽 위와 주위에는 직경 23.6m, 높이 7.5m가 되게 돌을 쌓은 뒤, 물이 내부로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해 점토를 20cm 두께로 발랐다.

안에는 동서로 길게 2.15m×1m의 목관을 놓았고, 동쪽의 머리끝에서 50cm 떨어진 곳에 1.8m×1m 0.8m되는 크기의 부장품 목궤를 놓았다. 출토된 장신구의 유물은 한결같이 순금제였으며, 신분을 가늠할 수 있는 마구류도 이제까지 출토되지 않았던 진귀한 것이었다. 출토된 유물들로 미루어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의 능으로 추정된다. 특히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관은 경주 시내에 있는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들에서 출토된 금관보다 크고 장식이 한층 더 호화로운 것이었다.
또한 자작나무로 만든 말다래(말이 달릴 때 튀는 흙을 막는 마구)에 하늘로 날아오르는 천마가 그려져 있어 고분 이름을 천마총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는 신라의 회화예술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실물자료이다.
목관 안에는 금제 허리띠를 두르고 금관을 썼으며, 둥근 고리장식의 자루가 붙은 칼을 차고 팔목에 금팔찌 및 은팔찌 각 1쌍, 그리고 손가락마다 금반지를 낀 주검이 누워 있었다. 이것이 옛 신라인의 생활모습을 짐작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됨은 물론이다.
천마도 신라의 그림 수준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말 옆구리에 진흙 같은 것이 튀지 않도록 달아매는 다래에 그려진 그림으로 너비 75cm, 세로 53cm의 크기이다.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 겹 겹쳐 실로 누비고 둘레에 가죽을 댔다. 안쪽 주공간에 백마를 그렸는데. 네 다리사이에서 나온 고사리 모양 같은 날개, 길게 내민 혀, 바람에 나부끼는 갈기와 위로 솟은 꼬리 등이 하늘을 나르는 천마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천마는 사실적인 그림이 아닌데다 백색 일색이기 때문에 말의 몸에 힘이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실루엣으로서는 잘 묘사되었다. 둘레의 인동 당초문대도 가부가 정확히 비율로 구성되었으며 고구려 사신총에서 보는 완숙한 당초문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금관 전형적이 신라의 금관이다. 피장자가 착용한 채 발견된 이 왕관은 원형 대륜(머리띠) 앞에는 네 줄기의 出자형의 장식을, 뒤에는 두 줄기의 사슴뿔 모양 장식을 세운 형태이다. 다른 금관에 비해 금판이 두텁고, 대개가 출자형 가지가 3단인데 이 금관은 4단인 것이 특징이다. 또 다른 고분과는 달리 이 관을 제외한 내관과 기타 장신기구들은 모두 관 밖에서 다른 부장품드롸 함께 발견되었다.
국보 제188호 로 지정되어 있다.
허리장식 전체 길이 125cm인 허리띠는 목관내 피장자의 허리 위치에서 착용된 채 발견되었다. 허리띠 안쪽에 대어 있던 가죽은 이미 모두 삭아 없어져 버렸다. 금허리띠는 44개의 과판(띠를 구성하는 판)과 띠고리, 그리고 고리에 끼우는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모두 13조의 허리장식이 달려 있다. 구름무늬가 있는 과판 전면에는 9개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 안에 댄 가죽에 못을 박게 되어 있다.
긴 타원형 금판 다섯 개가 사각형의 연결판으로 연결되어 있는 허리장식 끝에는 꼬리장식으로 숫돌모양, 곡옥, 유리옥, 족집게, 구멍 뚫린 병 모양, 고기 모양등이 달려 있다. 각모양마다 당시 사회에서 중요시되었던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들어 있을 터인데 이를 해석해내지 못하고 있다. 신라 허리장식으로서는 가장 큰 것이다.
국보 제190호로 지정되어 있다

미추왕릉
대릉원 정문에서 가장 가까운 능으로 능 앞에 대나무밭이 있고, 능문에 세워져 있다. 미추왕은 제13대 왕으로 성은 김씨이고 탈해의 자손이다.『삼국사기』에 "미추왕은 백성에 대한 정성이 높아 다섯 사람의 신하를 각지에 파견하여 백성의 애환을 듣게 하였다. 재위 23년 만에 돌아가니 대릉에 장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서 대릉원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제14대 유례왕 때의 일이다. 적국인 이서국이 쳐들어와 곤경에 빠져 있는데, 어디선가 구에 대나무잎을 꽂은 원병들이 나타나서 순식간에 적을 무찔러 위급한 상황을 면하게 해준 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신라의 병사들이 괴이하게 여겨 대나무잎이 행방을 잘 조사해보니 그 대나무 잎이 미추왕릉 앞에 높이 쌓여 있었다. 이후 미추왕릉을 '죽릉' 또는 '죽장릉'이라고 하였다. 그 뒤에도 국난이 있을 때마다 여기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사적제175호로 지정되어 있다.

황남대총
황남대총(98호 고분)은 동서의 길이가 80m, 남북 무덤이 길이 120m, 높이가 25m나 되는 거대한 능으로 낙타등처럼 굴곡이 져 있다.1975년 발굴조사 때의 기록에 따르면 북쪽의 능은 여자, 남쪽의 능은 남자의 묘였다. 호석이 맞물린 상태로 보아 남쪽 능을 먼저 축조하고 나서 북쪽 능을 잇대어 만든 것임을 알 수 잇다. 북분에서는 금관을 비롯한 금목걸이, 팔찌, 곡옥 등의 장신구가 수천 점이 나왔으며, 남분에서는 무기가 주류를 이루는 2만4천9백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남분의 묘곽은 주곽의 범위만큼 땅을 약간 카고 큰 냇돌을 깐 뒤 다시 그 위에 잔자갈을 깔아 기초공사를 하고 주곽을 지상에 놓았으며, 부곽은 그냥 지반을 바닥으로 하였다. 곽의 중앙에는 이중으로 된 관이 놓였다. 유물은 내관과 와관의 안, 부곽과 주곽의 뚜껑 위 등 곳곳에서 나왔는데, 내관에서는 장신구류와 대도 등이, 외관과 곽 사이에서는 금제 그릇, 유리그릇 및 병 등이 나왔다

부곽에는 바닥 전면에 커다란 항아리를 놓고 그 위에 말안장, 쇠도끼 등을 놓았다. 특히 금동제의 말안장은 앞뒤로 새김을 하고 비단벌레의 날개를 붙였는데, 보랏빛이 어우러져 말할 수 없이 호화로운 느낌을 준다. 북분은 목곽내에 이중관이 들어 있을 뿐 부곽은 따로 없는데, 부장품은 목곽 안, 목관과 목관사이의 부장품부, 목곽 상부 등 빈 공간에 빠짐없이 채워졌다. 여기서는 금동관, 은관이 나온 남분과는 달리금관이 나왔으며 금제 허리띠 등 각종 금제 장신구들이 관 안에서 나왔고 목곽 상부에서도 금베의 굵은 고리 귀고리가 열 쌍이나 나올 정도로 많은 양의 호화로운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이 고분 피장자는 칼을 차고 있지 않는 데다, 따로 부장된 은제 허리띠의 끝부분에 '부인대'라고 따로 침으로 새긴 글씨가 있어 주인공이 여자임이 판명되었다. 이 고분을 일반인이 관람할 수 있는 전시 고분으로 삼을 예정이었으나, 천마총에서 더 좋은 유물이 나오자, 이 고분은 원상으로 복구 시키고 천마총을 지금과 같이 만들었다.